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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Interview] 재난 현장의 나이팅게일을 꿈꾸며, 최남희 서울내러티브연구소장

2019.07.11

[Power Interview] 재난 현장의 나이팅게일을 꿈꾸며, 최남희 서울내러티브연구소장

 

 

 

“뉴욕의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에서 우연히 어떤 여자와 같은 벤치에 앉았어요. 5년 만에 뉴욕에 왔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9‧11 테러 사태의 피해자였어요. 월드트레이드센터 82층에서 일하던 변호사였는데 가까스로 빠져나왔대요. 이후 전국을 떠돌아다녔죠. 뉴욕 쪽만 바라봐도 구토가 나올 정도로 트라우마가 심해서요. 당시 기억들이 너무 두려워 심지어 직업까지도 바꿔봤다더군요. 재난 피해자들의 상처라는 게… 이 정도로 깊고 오래갑니다.”

최남희(69) 서울내러티브연구소장(전 국가위기관리학회장)의 회상이다. 최 소장은 우리나라 재난 심리지원 분야의 대모(大母)로 통한다. 지난 2003년 우연히 대구 지하철 화재 현장을 찾았고, 그 현장을 통해 재난 피해자들의 마음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후 대구(지하철 참사), 봉화(홍수), 태안(기름유출사고), 평창(홍수), 제주(태풍) 등 재난이 발생한 지역을 찾아다니며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 편에선 그들의 마음을 돌보는 시스템을 제도화하려는 노력도 이어갔다. 소방방재청을 쫓아 다니고, 청와대의 문도 두드려 봤다. 현재 전국적으로 구축된 ‘재난심리지원센터’는 당시 노력의 산물이다. 간호사에서 교수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 스스로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나이팅게일(Nightingale)’과 닮아있는 그녀의 행보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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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희 서울내러티브연구소장

 

 

 

 

인생영화 한 편에 삶의 궤도가 바뀌다

 


최남희 소장의 학창시절 꿈은 소설가였다. 문예대회에서 장원을 할 만큼 재능도 있었단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성탄절 때 가족과 함께 본 영화 한 편이 삶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엑소더스>라는 영화였어요. 유대인 난민들이 배를 타고 도망치는 내용이었죠. 거기 미국인 간호사가 한 명 나오는데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손길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가장 괴로운 순간에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입니다.”

최 소장의 결심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문과생이었던 그녀는 진로를 바꿔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적응이 쉬울 리 없었다. ‘기술’만 가르치려 드는 수업 방식 때문이었다. 다니다 말다를 반복해가며 어렵게 졸업했고, 졸업 후에는 딱 3개월만 병원에서 근무하고 나왔다. 최 소장의 시선은 오히려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지역들. 처음 간호사를 택했던 이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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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시사기획 ‘창’에 출연했던 최남희 소장의 모습(사진: 방송캡처)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개인 봉사활동 차원으로 빈민지역을 돌아다녔다. 친구와 지인들을 통해 끌어 모은 후원금으로 현장의 틈새를 매우는 일에 나선 것. 특히 빈민지역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집중했다. 먹고 살기 버거운 어른들은 늘 일거리를 찾아 밖으로 나돌았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방치되다시피 했다. 최 소장은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다치거나 죽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했다.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제도적 안전장치가 시급하다고 판단한 최 소장은 탁아 관련 입법 활동에도 매진했다. 이런 노력들은 현재 시행되고 있는 ‘영유아보육법’의 밑그림이 됐다.

그 사이 최 소장의 신분은 교수(서울여자간호대학교 간호학과)로 바뀌었다. 본인의 신분이 안정되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자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1987년, 당시 빈민지역이었던 정릉4동에 ‘밝은집’이라는 구호단체를 꾸리고, 정기 후원회원도 모집하며 보다 전문적으로 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5개 대학의 자원봉사단을 구축해 주민교육을 진행하고, 주민들과 함께 정기간행물을 만드는 등의 커뮤니티 활동도 펼쳤다.

이 대목에서 오버랩되는 인물이 바로 ‘나이팅게일’이다. 최 소장은 “‘광명의 천사’로 불린 간호사로만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저명한 학자이자 혁신적인 사회운동가가 바로 나이팅게일”이라며 “런던 템즈 강변에 넓게 퍼진 빈민들을 돌보던 마음과 빅토리아 여왕을 찾아가 필요한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신념을 닮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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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남희 소장은 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솔루션을 찾는다

 




상처 받은 마음에 ‘예후’란 건 없습니다



연구소의 활동을 살펴보면, 최 소장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2006년, 소방방재청과 함께 진행했던 ‘재난피해 아동 심리충격 연구학교’ 활동이 대표적이다. 평창 수해로 고통 받은 아이들의 심리를 지원하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진부초등학교를 시범학교로 지정해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교과 커리큘럼에 심리 지원 프로그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설계했다. 미술 시간에 물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고, 과학 실험시간엔 홍수의 원리를 직접 깨우쳐보는 식이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진행한 주제 발표시간에는 그들의 숨겨왔던 속내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최 소장은 “특별히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보단 평소와 똑같이 놀고 공부하면서 스스로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활동은 대구, 봉화, 제주, 태안 등의 지역에서도 재난 특성과 지역의 특색에 맞춰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된 제2의 무대가 바로 재난 현장이었다. 대구 지하철 사고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최 소장의 발을 묶어 두기에 충분했다. 아예 대구에 월세방을 얻어놓고 주말마다 내려가 피해자들을 만났다. 최 소장은 “그때 피해자들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데, 당시 대학교 1학년짜리 여학생이 지금은 애 엄마가 되어 아이 키우는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고 했다.

최 소장이 당시 재난 현장에서 발견한 가장 큰 문제점은 누구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재난 현장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어딜 가 봐도 기관‧단체‧학교‧자원봉사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죠. 하지만 정작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들어주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심리 상담이나 치료를 진행하는 부스는 차고 넘치지만, 피해자들이 환자는 아니잖아요. 당장 가족의 생사 확인이 안 되고 있는 상황에서, 설문조사를 시키고 심리상담을 받으라고 권하는 모습을 보며 ‘이건 아니다’ 싶었죠.”

최남희 소장은 재난 상황을 조속히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난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자연스레 자기들의 얘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2000년에 ‘서울내러티브연구소’를 개소한 것도 내러티브(서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자는 의미였다.

연구소의 활동을 살펴보면, 최 소장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2006년, 소방방재청과 함께 진행했던 ‘재난피해 아동 심리충격 연구학교’ 활동이 대표적이다. 평창 수해로 고통 받은 아이들의 심리를 지원하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진부초등학교를 시범학교로 지정해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교과 커리큘럼에 심리 지원 프로그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설계했다. 미술 시간에 물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고, 과학 실험시간엔 홍수의 원리를 직접 깨우쳐보는 식이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진행한 주제 발표시간에는 그들의 숨겨왔던 속내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최 소장은 “특별히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보단 평소와 똑같이 놀고 공부하면서 스스로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활동은 대구, 봉화, 제주, 태안 등의 지역에서도 재난 특성과 지역의 특색에 맞춰 꾸준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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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들과 함께 재난 피해지역의 공동체 복원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최남희 소장



무엇보다, 재난 심리 지원에 있어 최남희 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지속적인 추적 관리다. 최 소장이 현 시스템에서 가장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 성급한 손해사정 이후, 마치 빚을 갚듯 피해보상을 해주고 ‘나 몰라라’하는 방식은 재난 피해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사고 후 10년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종료시점에도 피해자들에게 갖가지 치유의 길을 열어주던 미국의 9‧11 사고 대처와는 분명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사람이 평생 물 근처에 못가는 경우도 많아요. 바람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태풍 피해자도 있죠. 살아가면서 겪게 될 트라우마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원 역시 달라야 합니다. 하지만 우린 너무 고민 없이, 소위 ‘쿨’하게 처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대구 지하철 사고 때 간신히 살아남은 7살, 8살짜리 꼬마들에게 각각 2천500만 원 씩 보상하고 끝냈는데… 스무 개 넘는 유해가스가 득실대던 곳에 있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후유증이 안 생길까요? 과연 그 아이들이 남들처럼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서 살 수 있을까요? ”

꿈 많던 문학소녀는 50여 년이 지난 후 가장 힘든 순간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재난 전문가가 되었다. 최남희 소장은 “삶은 필연인 것 같지만 우연”이라며 그저 마음이 동하는 곳으로 향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선의를 가지고 재난 현장을 찾고 싶어 할 사람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최 소장은 “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피해자들은 생각보다 훨씬 경황이 없다”면서 “사전에 본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명확히 규정하고 방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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